Insights

데이터는 과거를 보여줄 뿐, 미래의 길은 제시하지 않는다

권진석

Jin Kwon

2025-05-26

May 26, 2025

제 커리어를 돌이켜보면 2년 이상 소속되었던 회사가 거의 없습니다. 이직이 잦았던 편인데, 전 직장 상사 분들 중에는 저보다 경력은 훨씬 길지만 몸담았던 회사 수는 적은 분들이 계세요.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을 많이 느끼곤 해요.

많은 이직 경험이 있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제 의지로 퇴사했던 적은 단 한 번뿐이었어요. 그 한 번의 자발적 퇴사에서 얻은 경험이 지금까지도 제 사업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데이터 분석의 한계를 마주한 순간

제가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는 B2B핀테크 스타트업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걸 배웠지만, 당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디자이너가 활용할만한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직을 준비하게 되었고, 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으면서, 당시 관심이 많았던 재테크와 관련된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직원 10~15명 정도의 작은 회사였고, MAU 3만 명 정도의 잔돈 모으기 앱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문제는 명확했어요. '잔돈 모으기'라는 컨셉 때문에 사용자들이 큰 돈을 앱에 보관하지 않으려 했거든요. 목표는 주간 저축 금액을 늘리는 것이었는데, 저는 데이터 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어요.

사용자 행동 데이터를 분석하고, A/B 테스트를 돌리고, 다양한 가설을 세워서 실험했습니다. 하지만 몇 달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간 저축 금액은 유의미하게 늘지 않았습니다. 물론 늘긴 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회사의 창업 초기부터 꼭 만들고 싶었던 기능을 추가하기로 결정했거든요. 포트폴리오 투자 기능이었습니다. 당시 이 서비스는 주식 투자를 신한투자증권에 의존하여 개발했었고, 포트폴리오 투자 기능의 개발이 미뤄지고 있었습니다. 신한투자증권에서 제공해준 API를 활용해 매우 불편한 UX(포트폴리오에 포함된 주식 수만큼 비밀번호를 입력해야함)로 런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3개월 만에 주간 저축 금액이 300% 증가했어요. 충성 고객들을 중심으로 월 10만원, 20만원씩 저축하기 시작한 거예요. 2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성장을 3개월 만에 달성했습니다.

이 기능은 데이터적으로 검증된 게 아니었습니다. 창업자는 초기부터 만들고 싶어했던 기능이었지만, 사용자 인터뷰나 설문조사에서 나왔던 결과도 아니었고, 구현도 급하게 하느라 UI가 불편했습니다. 이 때, 프로덕트 본질은 데이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데이터가 놓친 것: 사용자의 본질적 니즈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은 건, 데이터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여줄 뿐, 미래의 길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데이터 분석은 기존 사용자 행동의 최적화에는 도움이 됐지만, 사용자의 근본적인 동기와 욕구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어요. 오히려 프로덕트를 만드는 사람들의 직관과 사용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더 중요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너무 당연합니다. 사용자는 프로덕트에 돈이나 시간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프로덕트는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줘야합니다. 이 경험 이후, 저는 더이상 데이터에 집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고객에게 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이 있을지에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Carrying Capacity와의 관계

Carrying Capacity는 토스의 이승건 대표의 유튜브 영상으로 국내에서 유명해진 개념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프로덕트가 담을 수 있는 고객의 그릇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토스는 간편송금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는데요, 당시 간편송금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고객의 수는 정해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확보할 수 있는 고객의 수를 늘리기 위해 신용점수 조회 기능을 추가했다고 했고요. 1천만 명이 넘게 사용하는 앱이 되기 위해서 토스는 끊임 없이 기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고객에게 줄 수 있는 가치와 Carrying Capacity의 개념을 결합하면, 프로덕트는 고객에게 줄 수 있는 가치를 끊임 없이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프로덕트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낼 수 있게 됩니다.

블루오션에서는 데이터보다 비전이 먼저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마케팅 교수님이 말씀하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블루오션은 시장이 없는 곳이고, 레드오션은 시장이 있는 곳이다.” 이 말의 요지는 블루오션이 더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죠. 블루오션은 아직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없는 곳이고, 레드오션은 이미 시장이 형성된 곳입니다. 대부분의 블루오션은 레드오션이 되기 전에 사라집니다. 하지만, 블루오션에 뛰어드는 사람은 그곳이 레드오션으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으로 뛰어드는 것이죠.

블루오션은 시장이 없어왔던 곳이기 때문에 과거의 데이터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이런 시장에 진입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시장에서 배웠던 지혜, 비전과 직관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데이터는 검증 도구로는 훌륭하지만, 혁신의 방향을 제시해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흔히 데이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The Tiger That Isn't”이라는 책에서는 데이터는 활용하는 사람에 의해서 의미가 바뀐다고 합니다. 가령, 물 컵에 물이 반이 차있는 것을 보며, 누구는 반 밖에, 누구는 반이나 차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죠.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데이터를 활용하는 사람은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데이터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무언가를 최적화시키기 위해 데이터만큼 좋은 것도 없기 떄문이죠. 다만, 스타트업은 영업이익과 함께 서서히 성장하는 회사가 아닙니다. 대표가 자신의 이력과 이름을 팔아 큰 자본을 모으고, 이걸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높은 시장 점유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하면 대표와 그 회사는 망하게 됩니다. 스타트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이뤄내야합니다. 갑작스럽게 만들어내는 BEP 또는 훨씬 더 큰 가치로 투자받을 수 있는 성장. 저는 이 길이 과거에 만든 데이터에 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거고요.

References

Keywords

Startup

Product Management

스타트업

프로덕트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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